패션칼럼 2014-04-14

이탈리아 패션, 살아있네~

런던 빅토리아 & 알버트 뮤지엄에서 절찬리에 열리고 있는 블록버스터 패션 전시회 <The Glamour of Italian Fashion 1945-2014>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늘날까지 이탈리아 패션의 글래머러스하고 포괄적인 룩을 잘 보여준다. 화려한 드레스와 날카로운 테일러드 수트 사이를 관통하는 전시회는 이탈리아 패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국제적인 스타일을 주도할 것임을 잘 보여준다.





돌체&가바나와 미소니 부터 프라다와 베르사체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패션 하우스들은 글로벌 패션 분야에서 강력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런던 빅토리아 & 알버트 뮤지엄에서 열리는 새로운 블록버스터 전시회 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가 오랜 동안 세계패션에 끼친 영향력과 전통을 잘 보여준다.



럭셔리, 고급 소재 그리고 정교한 장인 정신을 포함, 이탈리아 패션 산업의 중요한 측면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 하우스의 개인적인 친밀한 룩을 만날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오늘날까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와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보여준 정교한 테일러드 아이템과 실용적인 기성복, 그리고 미소니 패밀리에 의해 개척된 시크한 니트웨어, 로마 기반의 오트 쿠튀르 산업은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프랑스와 영국,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탈리아 패션은 대내외적인 환경으로 인해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비교적 천천히 발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확실한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1945년, 전후 이탈리아 정부는 정신과 육체, 그리고 금융 몰락으로 쇠약해진 나라를 부흥하기 위한 목표를 세웠다. 마샬  프랜을 통한 미국 원조와 함께 이탈리아의 많은 기업가들의 노력에 의한 이탈리아 공장의 빠른 재정비는 이탈리아 패션 전후 복구의 초석을 다지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5년 뒤인 1950년대에 이탈리아는 파리가 주도하고 있는 오트 쿠튀르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이탈리아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패션 액세서리와 작은 가죽 제품을 수출해 왔으며 12세기 이래로 베니스, 피렌체, 로마에서 고급 직물과 신발, 주얼리를 생산해 온 뛰어난 제조 기술을 가졌음에도 이탈리아는 파리나 런던에 비해 오트 쿠튀르에 상당히 늦게 발들 들여 놓게 된다. 당시 불안정한 정국이 이탈리아 패션의 단일화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들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주변국인 파리와 런던 디자이너들과 경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사업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조르지니(Giovanni Battista Giorgini)는 미국 백화점의 이탈리아 제품 구매 담당으로 고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피렌체 주거지였던 빌라 토리아니에 패션 회사를 설립하고 패션쇼를 열 계획을 세운다. 1951년 2월 피렌체에서 열린 첫 번째 패션쇼에 외국 바이어와 프레스들에게 불러오는 데 성공한다. 미국의 바이어와 프레스가 대부분이었지만 이탈리아 패션이 처음으로 국제 패션 시장에 선을 보인 셈이다. 그들 중에는 미국 잡지 <하퍼스바자> 편집장 카멜 스노우도 있었다. 바로 1947년에 열린 디올의 첫 패션쇼를 보고난 후 “친애하는 크리스티앙, 그것은 과히 혁명입니다. 당신의 의상은 완전히 새로운 룩이에요" 라고 선언하며 그 컬렉션을‘뉴룩’으로 명명해 패션사의 한 페이지로 남긴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편 조반니 바티스타 조르지니는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의 쇼 케이스를 열기로 결정하는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귀족 출신들이었다. 시모나 콜론나 비스콘티 디 체사로, 카로사(조반나 카라촐 공주), 마리아 안토넬리, 알베르토 파비아니, 에밀리오 슈베르트, 노베라스코, 반나, 폰타나 자매 가 대표적인 귀족들이다. 에밀리오 푸치, 아볼리오, 프랑크 베르톨리, 클라레테 갈로티로 대표되는 패션 부티크와 니트웨어 섹션도 포함되었다.


이 쇼 케이스는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다음 패션쇼는 피렌체 피티 궁에서 치러야 했다. 1952년에 살라 비앙카(Sala Bianca)에서 19세의 로베르토 카푸치가 첫 선을 보였다. 이것은 이탈리아파의 탄생으로 이들은 프랑스의 쿠튀르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페라가모, 구찌, 푸치 같은 브랜드는 제트족의 머스트 바이 아이템이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강렬하고 독특한 프린트의 실크 저지 시프트 드레스는 납작하게 접을 수 있었으며, 손수건처럼 작아 여러 개의 가방을 들고 가는 여행에 완벽한 아이템이었다.




50년대 이후 의상 디자이너와 텍스타일 제조업자들은 점차적으로 거래를 재개해 그들의 스타일리시한 디자인은 전쟁 중에 사라졌던 대중들의 매력적인 패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이탈리아의 하이 패션은 탁월한 테일러링은 수출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패션의 테일러링에 대한 열정 또한 전후 10년 동안 비정형의 세련된 스타일로 주목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테일러드 의류의 명성은 스타일리시한 이탈리아 배우들의 유명세 때문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Marcello Mastroianni)가 60년대 영화 <라 돌체 비타>에서 입은 트림 수트는 이탈리아 수트를 세계적으로 대중화하는 데 일조했다.


개별 고객을 위한 재단을 하는 맞춤복과 급증하는 대중적인 기성 정장 수트는 성장하는 전 세계 고객들에게 사랑받았다. 웰-테일러드 수트는 정확한 재단과 피트, 그리고 훌륭한 마무리 디테일을 요구한다. 포켓이나 소매 형태와 같은 아주 작은 디자인 요소는 종종 지역마다 달랐다. 나폴리 수트는 로마식 수트와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한편 파리와 로마, 뉴욕의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프레타프로테와 오트 쿠튀르 사업은 50년대에 이어 60년대에도 여전히 엘리트들의 수요가 있었고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색상과 정교함을 제공했다.


이탈리아에는 수없이 카피될 정도로 탁월하고 재능있는 디자이너 마르케세 에밀리오 푸치가 있었는데 그는 40대에 패션 사업에 뛰어 든 늦깎이 디자이너다. 피렌테에서 일한 푸치는 애시드 브라이트 컬러와 사이키델릭 프린트로 만든 타이트한 실크 저지 시프트 드레스와 셔츠, 캣 수트, 이브닝 드레스, 카프리 팬츠와 수영복을 소유하고 싶었던 할리우드 제트 족들에 의해 유명세를 탔다. 푸치는 자신의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스윌리 디자인(Swirly design)이  1960년대 팝 아트 패션의 원조라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스트레치 천을 이용하여 고속 보트, 컨버터블 자동차와 비행가 여행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디자인을 만들어 냈다. “여성들은 현대적인 삶 속에 녹아든 유선형의 날씬한 모습으로 우아하고 자유롭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줄무늬와 더불어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꽃무늬가 있는 타이 & 로시타 미소니의 아름답고 예술적인 니트웨어는 1967년에 피렌체의 피티 궁에서 발표된 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소니는 독창적인 장인 정신을 간직한 가족 사업으로 계속 번창했다. 피렌체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구찌와 페라가모 브랜드는 할리우드 제트 족들 사이에서 반드시 가져야 할 머스트 바이 아이템이 된 최고급 수제화와 가죽 제품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엘리트 디자이너들을 호칭하기 위해 생겨난 말이 바로 호화로운 삶을 뜻하는 라 돌체비타(la dolce vita)를 의미하는 ‘구치푸치신드롬(Gucci-Pucci Syndrome)'이다.


다른 한편으로 1967년 엘리오 피오루치(Elio Fiorucci)가 만든 도발적인 패션 레이블 피오루치가 있다. 그 가게는 처음에는 런던의 카나비 스트리트와 뉴욕의 패션 트렌드를 밀라노로 가져왔고, 그 후에는 언더그러운드 스타일과 밝은 색상, 애니멀 프린트를 사용하여 독특한 룩을 만들고 신축성 있는 데님과 디자이너 진의 개념을 시장에 도입해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브랜드를 확장했다. 이 가게들은 책과 가구 그리고 당시의 팝 문화를 반영하는 음악 뿐 아니라 빈티지 패션까지 포함시켜 확장시켜 80년대까지 그 인기를 이어 나갔다.


드디어 ‘메이드 인 이태리’가 국제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이탈리아 경제는 패션과 텍스타일 산업의 활성화로 급속한 성장을 이룩했다. 사회적,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패션 산업은 활짝 만개했다. 다수의 패션 및 관련 제조업체들은 대부분 가족 중심으로 운영되어 패밀리 경영이라는 이탈리아 특유의 시스템을 보여주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오트 쿠튀르의 인기로 인해 제조 패션에 다시한번 부흥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패션 프레스와 광고 산업 주변 의류 및 텍스타일 공장과 함께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새로운 패션 캐피칼로 부상한다.


이제 '메이드인이태리'는 영화, 아트, 푸드, 여행, 디자인과 같은 프리미엄 제품의 다양성을 축하하는 마케팅 캠페인이 되었고 그 중에 최고가 바로 패션이었다. 이러한 수 십 년간의 국제적인 프로모션 캠페인은 '메이드인이태리'가 세계적인 스타일 트렌드 마크가 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가 되자 이탈리아 패션은 열정을 쏟아 붓고 모든 창의성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어 드디어 도약을 하게 된다. 트렌드를 찾아내고 재능을 육성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은 전 유럽으로부터 바이어와 프레스를 끌어 들일 수 있었다.


밀라노는 피렌체, 프라토, 발다뇨와 롬바르디 같은 이탈리아 모직 센터를 중심으로부터 접근이 용이한 곳에 위치했으며, 그곳에서는 면섬유도 생산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의류 제조업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여성과 남성 기성복을 전문으로 하는 살롱의 발달을 장려했다.


1965년에 펜디는 칼 라거펠트를 모피와 작은 가죽 제품을 판매하던 소규모 가족 회사의 디자이너로 고용했다. 1950년에 가족 공장의 경영권을 넘겨받은 니노 세루티는 1964년에 조르지오 아르마니를 조수로 고용하여 밀라노에 남성복 부티크 히트맨을 열었으며 자신의 모든 핵심 기술을 그에게 전수하였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1970년에 세루티를 떠나 1974년에 파트너 세르지오 갈레오티와 함께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했다. 아르마니는 영국의 테일러링 전통에 도전했으며 재킷을 해체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1975년에는 여성을 위한 첫 컬렉션을 만들었다. 앤드로지너스 룩에 영향을 받은 라인은 역동적이지만 절제된 느낌을 주었다. 특히 남성 주도적인 분야에서 점차로 늘어나던 여성들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는 절제된 스타일을 제안했다.


1970년대 중반에 지아니 베르사체는 밀라노로 옮겨 갔으며 제니, 칼라간, 콤플리체의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 밀라노의 비아 델라 스피가에 최초의 베르사체 부티크를 열었다. 타이와 & 로시타 미소니 부부는 기성복 니트웨어 사업으로 1970년대 초 최고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안토니오 로페스의 멋지고 선정적인 광고 일러스트레이션은 그들이 판매하는 제품만큼이나 독창적이었다.


결국 밀라노는 세계 패션이 중심지로 파리 다음으로 두 번째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탈리아 패션은 호화로우면서도 입기 쉬웠다. 여전히 오트 쿠튀르에 맞춰져 있는 고객들에게 매력적이었던 것은 일종의 우아함이었다. 물론 로마는 더 거대해졌고 발렌티노, 카푸치, 숀이 여자 가수들과 공주, 여배우들을 관객으로 오트 쿠튀르 의상을 발표하던 이탈리아 하이패션의 중심지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아는 유일한 이탈리아어 단어는 바로 불가리"라는 리차드 버튼의 발언으로 인해 이탈리아 브랜드 불가리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불가리는 이번 전시회의 메인 스폰서이기도 하다. 리차드 버튼은 1963년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함께 출연하면서 연인으로 발전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이탈리아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 불가리의 디이이몬드와 에머랄드로 장식한 목걸이를 선물해 화제를 모았다.


영화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시네마 시티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다. 시네마 시티 스튜디오는 1937년 "영화는 가장 파워플한 무기"라는 슬로건 아래 무솔리니가 주도해 세운 스튜디오였다. 이 슈트디오는 최고 디자이너가 만든 화려한 세트와 의상과 함께 전후 몇 년 동안 극단적인 매력의 동의어가 되었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 <로마의 휴일> 역시 오드리 햅번의 A라인 플레어 스커트와 숏컷 헤어를 유행시키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사실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와 할리우드 제트족 사이의 돈독한 관계는 이탈리아 패션의 또 다른 성공요소였다. 영화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로마의 휴일>은 이탈리아 현지에서 촬영이 되었다. 에바 가드너와 오드리 햅번은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단골 고객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럭셔리 웨어의 홍보대사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이탈리아 패션은 국제화 바람을 타기 시작한다. 많은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셀러브리티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글로벌 테스트메이커로서의 이탈리아 패션의 명성을 공고히 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의류에서 부터 가구 호텔이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대륙을 넘어 전 세계에 유니버셜한 제품을 팔고 있다. 글로벌을 넘어 유니버설 트랜드의 선두에 서있는 셈이다. 몇몇 이탈리아 기업들은 오랜 전통의 가족 기업을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 원로 디자이너들은 다음 세대들에게 영감을 주는 전통으로 작용라고 있고 신진 디자이너들은 단지 몇 시즌 전부터 이탈리아 패션의 미래로 부상 중이다. 이 두 세대를 하나로 묶는 것은 충성도 높은 고객들과 제품력, 그리고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의 경쟁 우위를 확보한 패션 캐피탈의 명성이다.


21세기 들어 여전이 굳건한 이탈리아 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의 비결은 이탈리아 스타일에 대한 세계인들의 무한한 수요일 것이다. 심지어 경제 불황으로 이탈리아의 명성이 도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패션 기업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2000년 이후 정치적 스캔들과 이민 문제 그리고 경제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텍스타일 네트워크와 연관 산업사이의 관계도 느슨해지고 있는 있다. 이탈리아 프리미엄 패션 하우스들은 외국인 소유가 늘어나고 있고 중국 공장들과 노동자, 소비자들은 현재 이탈리아 제품과 운명적으로 얽혀있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편 오는 7월 27일까지 런던 V&M 뮤지엄에서 열리는 전시회 에는 이탈리아 유명 패션 하우스에서 100가지 앙상블과 액세서리가 전시 된다. 참가 브랜드로는 시모네타(Simonetta), 푸치(Pucci), 소렐 폰타나(Sorelle Fontana), 발렌티노(Valentino), 구찌(Gucci), 미소니(Missoni),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돌체 & 가바나(Dolce & Gabbana), 마르니(Marni), 펜디(Fendi), 프라다(Prada), 베르사체(Versace) 등과 이탈리아 패션 산업의 차세대 디자이너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런던을 방문하는 독자들은 꼭 한번 들러보기를 강추한다.

















































Missoni>





<‘Guanahato’ dress>







<참고서적=패션의 역사>


글 유재부 패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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