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2020-08-29

故 다이애나 비 23주기, 왕실에 맞섰던 가장 반항적인 순간들

8월 31일은 영국 왕실의 가장 반항적인 인물이었던 다이애나 비가 타계한 지 23주기가 되는 날이다. 짧지만 굵게, 멋지게 살다 간 용기있는 여성 다이애나 비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들 만나보자.




8월 31일은 영국 왕실의 가장 반항적인 인물이었던 故 다이애나 황태자 비가 타계한 지 23주기가 되는 날이다.


만약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올해 59세인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1961~1997)는 영국의 전 왕세자비이자 현재 영국의 왕위 계승 순위 2위인 윌리엄 왕자와 6위인 해리 왕자의 어머니로서 36세의 한창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1980년 동화같은 결혼식을 올리며 왕실에 입성한 다이애나 비는 1997년 파리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영국 왕실을 대표하는 스타일 아이콘으로 명성을 누렸다.


공식석상에서는 대중적 세련미를 지닌 럭셔리 클래식으로 대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으며 해변이나 요트 위에서 휴가를 즐길때는 과감한 수영복을  선보이는 등 시대를 앞서간 원조 로얄 스타일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녀가 사망한지 23년, 뉴트로 바람을 타고 럭셔리 브랜드 디자이너들은 80년대 최고의 스타일 아이콘이었던 다이애나 비의 아이코닉한 스타일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다이애나 비의 두 며느리 케이트 미들턴과 메건 마클도 다양한 행사에서 시어머니 다이애나 비의 스타일을 오마주하며 존경을 표시하곤 했다.


패션 센스는 물론 누구나 인정하는 품위있고 침착하며 말솜씨가 좋은 프린세스로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다이애나 비는 순종이 최고 덕목이었던 당시 영국 왕실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왕실의 결혼 서약에서 '순종'이라는 단어를 없앴고 왕자를 병원에서 낳고 일반 학교로 보내는 등 '최초'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또한 전세계에 생중계된 1981년 '동화 같은 결혼식'으로 신데렐라가 되었지만 현실 속 다이애나 비는 '지옥 같은 결혼식'을 끝내기 위해 이혼을 선택했다.


다이애나 비는 생전에 진정한 용기와 기개를 드러낸 당당하고 용감한 현대판 프린세스였다. 그녀는 불합리하고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 '최초'라는 타이틀로 왕실의 '뉴 노말'로 만들었으며 불의를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기 전까지 세계 평화와 자선 활동에도 충실하게 임했다.


짧지만 굵게, 멋지게 살다 간 용기있는 여성 다이애나 비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들 10을 소개한다.



1. 결혼 서약의 '순종'이라는 단어를 없앴다



1981년 7월 찰스 왕세자와 결혼할 때, 다이애나 비는 영국 교회의 공통 기도서의 부부 서약에 들어있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생략했다. 덕분에 그녀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읽지 않은 최초의 왕실 신부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 전통은 30년 후 그녀의 첫째 아들 윌리엄 왕자가 케이트 미들턴과 결혼했을 때도 계속 이어져, 아들 부부 역시 '순종'이라는 단어를 자신들의 부부 서약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둘째 며느리 메건 마클도 2018년 둘째 아들 해리 왕자와 결혼할 때도 시어머니의 뜻을 이어 받아 '순종'이라는 단어를 삭제했다. 같은 해 엘리자베스 여왕 2세의 손녀 유제니 공주도 잭 브룩스뱅크와 결혼할 때 '순종'이라는 단어를 쓰지않아 이제 '순종'이라는 단어는 실질적으로 영국 왕실의 금지어가 되었다.



2. 산후우울증, 폭식증, 자해, 찰스의 불륜 등 왕실의 치부를 폭로했다



1995년 BBC 방송의 마틴 바시르와의 악명높은 폭로성 인터뷰에서, 다이애나 비는 윌리엄 왕자가 태어난 후 산후우울증과 함께 폭식증과 자해를 시도한 자신의 적나라한 상황을 스스로 공개했다.


찰스 왕자의 뷸륜 사실을 알고 난 후 다이애나 비가 주위에 도와달라는 외침의 방편으로 팔과 다리에 상처를 냈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폭식과 거식, 자기 혐오에 빠져 손목을 긋고 계단 아래로 몸을 던지는 등 자살시도까지 한 사실도 털어 놓았다.



또한 다이애나 비는 1982년 윌리엄 왕자가 태어난 후 우울증에 시달리는 동안 왕실은 차갑게 외면했다고 폭로했다. 그녀는 "왕실에서 나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울었다. 하지만 아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정신 건강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 다이애나 비의 용감함은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 왕자에게도 영향을 미쳐, 정신 건강 문제를 돕는 자선 단체 '해츠 투게더'에서 두 사람이 열심히 활동하도록 하는 동기부여를 제공했다.



3. "절대 왕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심경 고백



또한 BBC 방송 인터뷰에서, 다이애나 비는 "자신은 이 나라의 왕비가 되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영국 국민들에게 마음의 왕비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그녀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왕비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란 바로 내가 시집간 곳의 기득권층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다이애나 비는 "그들은 내가 별종이고, 규칙대로 하지 않고,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이끌려 일을 결정하기 때문에  나를 애시당초 왕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4. 왕실 전통을 깨고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사진 = 왼쪽부터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를 병원에서 낳은 후 퇴원하는 모습


왕실 아기들은 늘 궁전에서 태어났다. 적어도 다이애나 비가 이 상황을 바꾸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 그랬다. 다아애나 비의 병원 출산 결정으로 1982년 6월 런던 세인트마리 병원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 윌리엄 왕자는 병원에서 태어난 최초의 영국 군주로 기록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태어난 동생 해리 왕자도 형과 같은 병원에서 출산했다. 세월이 흘러 장남 윌리엄 왕자의 자녀이자 다이애나 비의 손자 손녀들인 조지 왕자(2103년)와 샬롯 공주(2015년), 루이 왕자(2018년)도 모두 아버자와 같은 병원에서 태어나 이 역시 영국 왕실의 뉴노말로 만들었다. 



5. 왕실 전통을 깨고 윌리엄, 해리 두 왕자를 일반 학교에 보냈다



일반적으로 영국 왕실의 자녀들은 궁중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지만 현대식 엄마인 다이애나 비의 생각은 달랐다.


첫째 아들 윌리엄 왕자가 성인이 되면 공립학교에 입학하는 최초의 영국 왕위 계승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3살 때 윌리엄 왕자는 보육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이 전통을 이어받아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 부부는 첫째 아들 조지 왕자가 겨우 2살이었을 때 웨스타크레 몬테소리 학교에 입학시켰다. 



지난 2017년 9월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2살된 딸 샬롯 공주가 보육원에 입학할 때 오빠 조지 왕자를 남런던의 사립학교 토마스 배터시 스쿨로 전학시켰다. 



6. 찰스와 카밀라 파커 볼스의 불륜에 맞섰다



2014년 미국 NBC 방송에서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촬영된 다이애나 비의 비밀 테이프가 공개되었다.


당시 영상에서 다이애나 비는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찰스와 결혼한 일이다. 내 결혼식은 최악이었다. 그 날 난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한 마리의 양 같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리고 그런 나를 지켜보는 한 여자가 있었다. 바로 카밀라 파커 볼스라는 여자였다"고 토로했다. 이미 결혼 전에 둘의 불륜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2년에 처음 출판된 앤드류 모튼의 논란이 많은 전기 '다이애나: 그녀의 진실'에서  다이애나 비는 자신의 결혼 생활 중 '가장 용감한 순간 중 하나'를 언급했다. 바로 카밀라 여동생 아니벨의 40번째 생일 파티에서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한 판 뜨기로 결심했다.


 1989년 다이애나 비는 군대를 갔다온 남편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가 다시 로맨스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찰스 왕세자의 외도에 지친 다이애나 비는 예고 없이 생일 파티장에 나타나 카밀라와 정면 승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사진 = 결혼 전의 다이애나와 평생의 숙적 카밀라 파커 볼스


카밀라를 만난 다이애나 비는 "나는 당신와 찰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난 당신이 그걸 알고 있었으면 한다"고 말하며 관계를 정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카밀라는 "당신은 원하던 모든 것을 얻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당신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고 두 명의 아름다운 아이들도 있다, 당신은 무엇을 더 원하는가?"라고 응답했다.


이에 다이애나 비는 "나는 남편을 원한다. 내가 방해해서 미안해... 그리고 너희 둘 다 지옥에 갈거야. 하지만 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어. 자신을 바보 취급하지 말라"고 응수했다.


10년 가까이 묻어 둔 이야기를 카밀라 파커 볼스에게 쏟아낸 다이애나 비는 폭식증에서 서서히 벗어나 찰스 왕세자와의 관계 회복을 단념하고 왕세자비 역할에 충실한다.


두 아들은 사랑으로 키우는 한편 봉사와 자선 활동에 헌신하며 영국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국민의 인기가 높아가자 오아실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다이애나 비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하고 통했다. 결국 왕실에 깊은 매신감을 느낀 다이애나 비는 1992년 12월 찰스 왕세자와 공식적인 별거를 선언했다.   



7. 두려움 없는 패션으로 보수적인 왕실 규범에 도전


↑사진 =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복수의 의미가 담긴 '리벤지 드레스'


다이애나 비는 1994년 6월 29일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열린 배니티 페어 만찬에 참석했다. 이 행사에서 그녀는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멋진 룩 중 하나를 입었다. 바로 그리스 출신 디자이너 크리스티나 스탬볼리언의 블랙 오프더숄더 넘버 드레스였다.


몸매 곡선을 강조한 섹시한 이 드레스는 실제로 3년 전에 다이애나 비를 위해 만들었지만, 당시에는 너무 대담하다고 생각되어 입지 않았던 드레스였다.


하지만 다이애나 비는 TV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별거중인 남편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혼외정사 폭로를 결정하고 가슴골과 어깨가 훤히 드러나 왕세자비 지위에 `적합하지 않은` 도발적인 오프숄더 드레스를 선택했다.


이 드레스는 역사적인 `리벤지 드레스(복수의 드레스)`로 불리며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사진 = '트라볼타 브레스'로 불리는 이 드레스는 경매에서 4억2천만에 팔렸다.


다이애나 비의 용기와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또하나의 단면은 1985년 11월 왕세자비로 백악관을 처음 방문했을때 당시 인기 절정의 헐리우드 배우 존 트라볼타와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의 OST '유 슈즈 비 댄싱'에 맞추어 플로어 한 가운데서 춤을 추었던 장면이다.



↑사진= 다이애나 비는 1988년 영화 '월스트리트' 런던 시사회에서도 똑같은 드레스를 다시 입고 나타났다.


다이애나 비는 1988년 영화 '월스트리트' 런던 시사회에서도 똑같은 드레스를 다시 입고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


당시 영국 왕실의 보수적인 규범에 맞게 않게 과감했던 이 드레스는 일명 '트라볼타 드레스'로 불리며 유명세를 탔으며, 지난해 경매에서 26만4000파운드(한화 약 4억2000만 원)에 팔렸다.



8. 사망 2달 전에도 자신의 옷을 팔아 기금을 모았다


↑사진 = 왼쪽부터 다이애나 비와 그녀가 최애하는 디자이너 캐서린  워커


교통 사고로 사망하기 불과 두 달 전인 1997년 6월, 다이애나 비는 존 트라볼타와 함께 춤을 출 때 입었던 '트라볼타 드레스'와 캐서린 워커의 '엘비스 드레스' 등에 이르기까지 총 79벌의 슈트와 드레스를 경매에 부쳐 기금을 모았다.


다이애나 비는 당시 15살이었던 장남 윌리엄 왕자의 아이디어로 로얄 마스텐 병원 암 기금 마련과 에이즈 크리스트 트러스트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의 옷을 경매에 부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이애나 비는 직접 손으로 쓴 메모를 통해 "이 멋진 자선 모금에 대한 아이디어는오직 단 한 사람, 아들 윌리엄이 제안했다"라고 입찰자들에게 밝혔다. 이 경매품들은 런던과 뉴욕에 있는 크리스티 옥션을 통해 판매되었다.



에너지 치료사이자 다이애나 비의 정신적 조언자 중 한 명이었던 시모네 시몬스는 자신의 저서 '다이애나: 라스트 워드'에서 다이애나 비와 함께 경매에 부칠 옷을 고르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다이애나는 왕실을 감동시킬만한 옷을 입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왕의 취향이 너무 형편없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보였나 보죠!"라는 농담을 건내기도 했다."

 


9. HIV와 에이즈를 둘러싼 낙인을 없앴다



공식 석상에서 친밀한 왕세자 비로 다이애나 비는 지난 1987년 4월 영국 왕실 멤버 중 최초로 에이즈를 앓고 있는 사람과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접촉해 큰 화제가 되었다.


영국의 미들섹스 병원 에이즈 병동을 방문한 다이애나 비는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녀는 한 연설에서 "HIV는 사람들을 위험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당신은 그들과 악수를 할 수 있고 그들과 포옹할 수도 있다. 그들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하늘은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10. "끝까지 싸우겠다" 죽는 순간까지 왕실에 맞서 결사항전



다이애나 비는 찰스 왕세자가 헤어진 후, 영국 왕실이 자신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만들기 위해 부정적인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BBC 방송의 악명높은 인터뷰어 마틴 바시르에게 말했다. 그녀는 인터뷰를 통해 "나는 조용히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또 "그들은 두려움으로 나를 깎아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강한 여자가 자기 몫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파워 우먼답게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결국 1992년부터 별거에 들어가 1996년 찰스 왕세자와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7년 8월 31일, 당시 애인인 알파예드와 리초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후 호텔에서 제공한 차를 타고 귀가 도중에 파파라치의 추격을 피하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해 결국 사망했다.


아직도 그녀의 죽음은 존 F 캐네디 미국 대통령의 암살과 함께 세계 2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사진 = 1997년 8월 30일, 다이애나 비가 사고 차량에 타기 직전 연인 알 파예드와 파리의 리츠호텔을 나서며 엘리베이터 CCTV에 찍힌 마지막 장면


결론적으로 왕실 전기 작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다이애나 비는 찰스 왕세자를 사랑했지만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 비를 사랑하지 않았고, 인형같은 왕세자비로 적당했던 다이애나 비는 알고보니 자아가 강한 독립적인 여자였다.


다이애나 비는 어린 시절 주변인들에게 휘둘렸지만 긴 고통의 시간 끝에 불의에 맞서고 잘못된 것을 당당하게 고치면서 당당한 본인의 삶을 살려고 했다.


그러나 왕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찾은 자유도 오래가지 못한다. 이혼한지 1년여가 지난 36세의 젊은 나이에 당시 연인이었던 이집트 재벌 2세 '도디 알 파예드'와 파리에서 파파라치의 추격을 피하려고 고속질주하다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패션엔 유재부 기자

fashionn@fashion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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