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2014-01-07

아름다운 작은 돌, 歌客 김광석

1월 6일은 가객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지 18년째 되는 날이자 그의 탄생 50주년이다. 올해는 유난히 그를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높다. 90년대 패션이 트렌드로 돌아오고 <응답하라 1994> 영향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세상살이가 팍팍하다 보니 그가 더욱 더 그리운지도 모를 일이다.



노래에 삶의 이야기를 담아낼 줄 아는 음유 시인이자 기교가 아닌 순수와 열정으로 노래 불렀던 歌客 김광석. 사랑만이 가치를 가졌던 젊은 날의 열정과 아픔, 변해가는 것과 잊혀져 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 홀로 살아가는 자의 외로움, 삶의 무게로 부대끼는 도시인의 힘겨움, 그리고 절망 끝에서 만나는 희망을 노래한 가객 김광석. 16일은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8주년이자 탄생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육신이 갔지만 목소리는 영혼으로 남아 각박한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한다. 대구 방천시장 옆에 위치한 김광석 길에는 하루 평균 1000명의 관광객들이 찾는다. 앞으로 김광석 골목 방송국도 만들어 관광객들의 사연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나의노래>. <거리에서>란 노래를 유행시켰던 인기가수 김광석씨(32) 6일 새벽 4시쯤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원음빌딩 4층 자기 집 거실에서 전기줄로 목을 매단 채 숨져있는 것을 부인 서모씨(31)가 발견했다. 서씨는 경찰에서 ”전날밤 11 50분쯤 귀가한  남편과 함께 맥주 3병을 마시다 안방으로 잠을 자기 위해 들어갔다가 새벽 4시쯤 이불을 덥어주기 위해 거실을 나왔더니 남편이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에 목을 매단 채 쓰러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조선일보 16일자 기사>

1996 1 6일 아침 TV 뉴스에서는 한 가수가 살고 있는 집의 거실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계단과 술자리를 집중적으로 카메라가 비추면서 가수 김광석의 자살 소식이 세상에 전해졌다. 일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언장도 남기지 않은 자살. 그래서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던 그의 죽음은 1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역사 속 화석이 아닌 살아있는 전설로 여전히 그를 추모하고 그리워한다.

어제는 가객 김광석이 떠난 지 18주년이 되는 날이다. 만약 살아 있다면 64년생이니 만 50세가 되는 날이다. 그래서 그를 기리는 사람들은 올해를 김광석 탄생 50주년으로 올해를 기념한다. ‘서른 즈음에를 불렀던 가객은 20년이 지난 쉰 즈음에도 대한민국 포크계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그의 생전 대학생이었던 필자는 여러 번 그의 공연을 봤고 모교에 공연을 온 그에게 사인까지 받을 정도로 김광석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필자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자 위안이었다.

80년대 운동(?)을 했던 이들에게 가장 잊지 못하는 공연은 바로 198710월, 종로 3가에 위치한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렸던 노찾사공연이 아닐까 한다. 당시 음반을 낸지 3년이 지났지만 서슬퍼런 군부 독재의 탄압으로 공연 한번 갖지 못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6월 항쟁을 통해 '호헌 철폐'와 '직선제 개헌'이라는 6.29선언을 받아낸 직후라 민주화에 대한 열기 또한 뜨거웠을 것이다. 노찾사 공연의 후반부에 하늘 색 스웨터를 입은 키 작은 청년인 긴장한 모습으로 무대로 걸어 나왔다. 김광석이라는 존재를 몰랐던 관객들은 잠시 술렁거렸다.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었고 김광석은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로 빈손 가득히 움켜진/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이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로 시작되는 김지하의 시로 만든 곡 녹두꽃을 불렀다.

노래가 시작되자 객석은 순식간에 조용해 졌다. 왜소한 체구에서 뿜어내는 목소리는 너무 처절했고 강렬했기 때문이다. 노래로 좌중을 압도하는 그의 진정성과 건강함은 관객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노래를 마친 무명의 청년에게 쏟아지는 박수소리. 그 박수 소리에 놀란 김광석은 무대를 내려가야 할지 말지를 머뭇거리다 내려간다. 관객들은 앙코르를 외치고 그는 다시 무대에 올라 이 산하에라는 곡을 불렸다. 우렁찬 청년의 패기에 깃들어 있는 사무친 슬픔은 당시 시대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관객들은 미안함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오름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렇게 김광석은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로 관객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지금도 당시 동영상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내가 제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 반성이리라.

올해 초에 우연히 JTBC ‘히든 싱어라는 프로그램을 볼 기회가 있었다. 재방송이었는데, 죽은 김광석과 살아 있는 팬들 사이의 모창 대결이었다. “제가 방송에 잘 안 나옵니다. 못 나오기도 하고요라는 생전에 M-TV 공연 영상이 오프닝을 대신한 프로그램에서 필자는 김광석의 목소리를 모두 맞추었다. 아무리 카피와 모창이 뛰어나다고 해도 짝퉁은 짝퉁이고 오리지날은 오리지날이었다. 목소리를 통해 전해오는 그의 진정성을 넘어서는 모창 가수는 결국 없었다. 물론 18년 동안 그의 노래를 테이프와 CD로 줄기차게 들었던 경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나만이 아니, 우리만이 느낄 수 있는 희로애락의 정서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자살 하루 전인 1996 1 5. SBS에서 박상원이 진행하는 <겨울나기>를 녹화하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울던 날’ 단 두 곡을 불렀다. 이 방송은 김광석 사망 7시간 전에 방송되었다. 당시 동영상을 다시 보니 짧은 스포츠머리에 무표정한 표정. 초췌한 얼굴. 1천회가 넘는 라이브 공연을 했던 그 열정적인 표정이 아니었다. 방송 녹화 후에는 시인이자 작곡가 백창우를 만나 유작이 된 ‘부치지 않은 편지’가 들어갈 <노래로 만나는 시>라는 음반 기획을 논의했다. 이 음반 역시 그의 죽음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호헌 철폐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드높았던 80년대 중반. 운동권 학생이 아닐지라도‘임을 위한 행진곡’이나‘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정도는 누구나 흥얼거리던 시절, 김광석은 데학 노래패 <메아리> <새벽>를 거쳐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활동한 소위 운동권 가수(?)였다. 노래패 활동을 통해 그의 노래는 인간의 심연 깊숙이 스며들어 감성을 흔들어 깨우는 마력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대학은 물론이고 길거리, 파업현장을 누비던 노래패 활동은 청년 김광석을 단련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공익근무로 제대한 그는 음악 친구들과 <동물원>을 결성한다. 당시 <동물원>의 기교 없는 소박한 음악은 자극적인 당시 주류의 음악에 익숙한 대중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담담하게 뽑아내는 노랫말에는 청춘의 일상이 녹아있었다. 노래패와 <동물원> 활동 시기의 그는 시대적 정서와 개인적 서정성을 동시에 얻게 된다. 다소 거부감 있던 제도권 밖의 민중가요를 대중화시키면서도 자신 만의 음악성향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5 5, 그는 소극장 라이브공연 1천 회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그의 소극장 공연은 날로 상업화·대형화되는 대중음악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당시 포크음악은 다양한 음악적 시도들에 밀려 고사 위기에 처했지만, 그는 단 몇 명의 관객만이 자리를 채우는 상황에서도 공연을 거르지 않았다. 1천회라는 의미는 그가 늘 관객과 소통하고자 노력했던 가수였다는 증거다. 아마 지금 살아있다면 SNS를 통해 이름을 날릴 법도 했건만


김광석의 노래에는 자신의 노래만큼이나 리메이크 곡들이 많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부르면 어느새 남의 노래도 그의 노래가 되어 버린다. 본인이 싱어송라이터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는 노래를 잘 찾아내는 재주를 가졌다.  무엇보다 관념적인 사랑이나 인생을 읊조리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이며,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보편적 정서를 담은 곡들이 그의 입으로 새롭게 탄생되던 것이다. 그가 발굴해 전하던 옛 노래들은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과 닮아 있다. 그래서 김광석의 공연은 볼거리가 많은 퍼포먼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타 하나, 하모니카 하나로 우리의 삶을 거짓 없이 진솔하게 풀어낸 그는 어눌하지만 무뚝뚝한 대구사나이였다. 그러나 말수 적은 그도 관객들과 만나면 세상사는 이야기를 주제로 수다 떨기를 좋아했다.

그의 진실한 마음 씀씀이로 인해 그의 주변엔 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후배들과 함께 공연 할 때면 그는 늘 무대 뒤 대기실에서 후배들에게‘밥은 먹었냐?’라고 물었다. 힘든 기색을 보이는 후배들에게 지갑을 털어 슬그머니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생활고로 가수의 길을 포기하는 후배를 볼 때면 자신의 일처럼 힘들어했다. 그의 공연 날에는 대기실에 늘 닭튀김냄새가 진동했다. 그래서인지 후배들은 아직도 생전 그의 공연을 떠올릴 때면 닭튀김 냄새부터 난다고 말한다. 요란스럽게 자신을 표현하지 않아도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만으로도 김광석은 작은 거인이었다. 어릴 때 그의 별명은 ‘작은돌’. 이름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사실 김광석은 요즘 아이돌처럼 빼어난 용모도 아니었고 개성이 강하지도 않았다. 단지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는 중간 중간 보여준 꾸미지 않은 서글서글한 눈매와 수줍은 미소가 그의 매력이었다. 오랜 지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익숙함. 그래서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드러낼 수 것 같은 사람. 그럼에도 내면에 조용한 열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김광석. 그 모든 것이 그의 노래에 담겨 오늘도 우리의 귓전을 맴돈다.

필자에게 가객 김광석은 여전히 작은 영웅이자 시인이자 광석이 형이다. 서른 둘의 나이에서 정지해 버린 그의 목소리에는 짧지만 그가 살아온 역사, 시대, 상처와 정서가 녹아 있다. 아울러 같은 시대를 살아온 나에게 늘 바르게 살라고 충고한다. 그의 라이브 공연을 녹음한 CD를 듣거나 DVD로 그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부끄럼 많은 소년 같은 표정과 청아한 목소리가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나의 심연을 건드려 뜬금없는 눈물 샘이 자극한다. 늙으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했던가? 그의 노래에는 눈물 그 너머의 희망과 치유의 힘이 있다. 누구나 상처가 있다.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은 가식이 아닌 진정성이 아닐까 한다. 그가 부른서른 즈음에가 나에게 마흔 즈음에그리고 쉰 즈음에로 끊임없이 변주되는 이유다. 그의 육신은 갔지만 목소리로 그를 만날 수 있어 나는 여전히 행복하다.

패션엔 유재부 기자

Kjerry38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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